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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비는 멈출 기세도 없이 졸아들었다 몰아치기만을 반복한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컴컴한 하늘만 바라보았다. 숨이 더웠다. 나는 왜. 소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계속 그렇게 서 있었다.


리츠생일 축전 


 장을 보고 돌아오던 레이겐이 공원에 멀거니 서 있던 리츠를 발견한 건 그리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거의 숨이 멎을 뻔했다. 남자는 낡은 장바구니를 허둥지둥 바닥에 내팽개치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달려 왔다. 세상에, 모브 동생! 레이겐은 리츠를 부르며 덥석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든다. 리츠는 그가 용케 우산은 안 버려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서 있었던 거야. 볼이 차갑네.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던 사내의 손은 몸을 타고 올라 뺨에 닿았다. 표정은 약간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리츠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비를 맞고 있었던 거냐. 응? 소년의 키는 남자의 가슴께를 겨우 웃돌았다. 리츠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떠드는 레이겐을 더 이상 참고 둘 수가 없었다. 


 "당신 너무 시끄러워요. 쓸 데 없이 말이 많아. "


 레이겐은 입을 다물고 딱 한 마디 한다.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


 그러나 레이겐은 리츠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면서도 고새를 못 참고 또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쫄딱 젖은 꼴로 널 보낼 수 없다. 이 모습을 모브가 보기라도 한다면 스승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게 분명해! 으, 시끄러워. 더 뭐라고 지적하기보다 리츠는 현명하게도 제 귀를 막는 편을 택했다.


 그래, 왜 이런 인간을 좋아하게 된 건데. 그는 끔찍해서 참을 수가 없다. 레이겐의 집으로 순순히 걸어가면서도 똘망한 눈망울을 바닥에 깐 채 도르륵 굴렸다. 이게 옳은 선택인가 싶다. 당장 제 집으로 도망가야 하는 게 아닐런지, 하지만 너무 늦었다. 레이겐의 우산을 든 손은 강하고 힘이 있었다. 리츠는 하필 사기꾼의 눈에 띈 것이 운이 나빴다고 자책한다.


 처음은 시시하고 뻔했다. 제 모든 것인 형을 기만하는 사기꾼, 믿어서는 안 될 어른. 사회가 만들어 낸 불량품. 거짓을 파는 남자. = 레이겐 아라타카. 매일 밤 그를 저주하고 형의 행복을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자각은 느렸다. 가끔 사무소에 갔다 돌아오면서 그 순간 순간이 가끔이 아니기를 바랐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평소에도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입꼬리를 보고 있으면 반댓쪽 입꼬리까지 빈 칸 없이 키스하고 싶었다. 길을 걷다 얻어걸려서라도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집 앞에서부터 사무소까지 뱅뱅 돌았다. 그 짓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허무함과 기묘한 안식감이 찾아왔다. 


 그는 상념에 빠져 있느라 레이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뭐... 따끈한 거 마실래? 모브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코코아라도. "


 레이겐은 리츠를 방 안으로 밀어넣은 뒤 황급히 문을 닫고 후다닥 제습기부터 켰다. 여름을 맞이하여 사 온 신상 물건이었는데, 오늘이 첫 개시였다. 리츠가 보는 앞에서 처음 쓰는 티를 팍팍 내며 이상한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습기가 웅웅 바람소리를 내며 훌륭하게 습기를 머금어내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얼른 달려가서 꺼내온 것은 커다랗고 보송한 목욕 타올이다. 가쿠란 소매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슬슬 좀 걱정이 되던 차였다.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검은 머리칼에도, 심지어 갸름하고 섬세한 턱 끝까지 온통 젖어 있다. 교복 세탁하려면 또 돈 들 텐데. 혀를 끌끌 차며 그는 축축해진 제 종아리를 대충 수건으로 닦아냈다. 리츠가 교복을 벗자 예쁘장한 몸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커다란 수건은 그의 가느다란 몸을 완전하게 감쌌다.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자 리츠는 다시 평소의 레이겐을 마주할 때처럼 심드렁하고 따분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물음에는 아예 대꾸하는 기색이 없다. 레이겐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제 몫의 믹스커피만 하나 탔다. 둘은 애초에 그런 사이였다. 리츠의 몫으로 커피포트의 따끈한 물을 머그컵에 삼분의 이 정도 부었지만 그가 마실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레이겐은 그에게 너무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 같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비는 왜 맞고 있었던 거냐?"

 "우산이 없어서요. " 


 거짓말. 듣자마자 거짓인 것을 알았으나 일부러 레이겐은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브 동생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이 꼼꼼한 소년이었으니 오늘 일기 예보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고 분명 뉴스에서는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러나 굳이 그걸 지적해줄 필요도 없다. 카게야마 리츠는 고작 열네 살이고, 이제 질풍노도의 시기 한가운데 있었으니까. 


 참 사람 신경쓰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레이겐은 리츠를 생각하면 목구멍 한 구석에 가시가 콱 박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형과 지독하게 닮았지만 또 지독하게 닮지 않은 그 소년은 왠지 모르게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얼굴과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레이겐은 리츠보다 정확히 두 배 더 오래 살며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닐 거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안락하고 편안한 게 좋았다. 사랑은 달갑지 않다. 


 프림이 쪼로록 커피에 녹아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레이겐은 머그 두 잔을 들고 다시 제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타인의 침입을 허락한 방은 덕분에 낯설어졌다. 집 안에서는 부드럽고 어딘가 시원한 소년의 향과 꿉꿉한 비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리츠는 눈을 굴리다 제 앞에 놓여지는 플라스틱 컵을 쳐다보기만 했다. 레이겐은 그의 새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다 그 옆에 앉아 커피를 호호 불어 마셨다. 계속 들리는 빗소리 덕에 침묵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


 그래, 둘이 만나면 늘 이런 식이야. 지리하게 이어지는 침묵에 레이겐은 또 후회했다. 소년은 자신을 만나면 말수가 줄어들었다. 모브보다 더 알기 쉽고 알기 어려운 소년이었다. 항상 마주칠 때마다 새까맣고 직설적인 눈은 경멸과 혐오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지금은, 글쎄. 레이겐은 그만 파고들기로 했다. 차숟가락으로 괜히 커피를 휘휘 저었다. 컵 안 쪽에 부주의하게 부딪힐 때마다 챙강챙강 소리가 났다. 리츠는 여전히 선이 고운 입술을 꾹 다물고 벽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우산을 잘 들고 다녀야지. 늘 내가 지나갈 수는 없잖냐. 오늘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


 게다가 너는 아직 중학생이고... 리츠는 띄엄띄엄 어떻게든 이어지는 타박을 그냥 하게 두었다. 맞아요, 운이 좋았어요. 나는 매일 그 길을 따라 걸었지만 한 번도 레이겐 씨를 보지 못했는걸요. 같은 말을 할 용기 따위는 없었다. 대신 그는 사납게 레이겐을 노려보다 툭 본심에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럼 그냥 비 맞고 있게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레이겐은 그 말에 허허, 중학생이 못하는 말이 없네. 하고 웃었지만 약간 마음에 스크래치를 받았다. 그래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는 일 없이 느물느물 정석으로 잘 받아쳐 준다. 그럴 수야 없지. 난 네 형의 스승이잖니, 모브 동생. 레이겐이 무심코 한 호칭의 제한은 리츠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아직 숨기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기분 나쁜 듯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렸다. 리츠는 자신이 졌음을 인정하고 눈을 감았다. 더 말해 봤자 제 입만 아픈 일이었다. 바깥과 다른 보송보송한 느낌에 자기 딱 좋은 온도라서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괜찮잖아. 리츠는 제 감정이 깊은 무엇이라고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어 놓은 한계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차게 뛰는 심장은 일단 모른 척 감추는 게 먼저다. 왜냐하면, 상대는 남자고, 형의 스승이며 볼품있는 구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자신과 나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으니까. 


 레이겐은 리츠가 눈을 감자 이대로 이 애가 여기서 자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 먼저 걱정이 든다. 벌써 밖은 여름답지 않게 많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하기도 참 그렇고. 그는 괜히 붕붕 뜨는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이미 저을 것도 없는 커피를 다시 차숟가락으로 저었다. 침대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리츠가 작달막하게 말했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어, 그래. 그렇구... 나, 가 아니라. 헉, 뭐?!"


 오늘 생일이라구요. 귀 아프니까 그 따위로 크게 소리치지 말아요. 그야말로 퍼드득 놀란 레이겐의 반응과 달리 당사자는 평온하고 침착했다. 그 엉뚱한 고백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레이겐은 여전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리츠를 어벙하게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며 제 눈가를 대충 비비적거렸다. 알 수가 없다니까. 알 수가 없어. 리츠는 그 형과 달리 또 인기가 많았고, 분명 원했다면 성대한 축하를 받았을 터였다. 그처럼 장래 유망한 인기남이 찾아오는 이 없는 남자의 맨션에서 자고 있다니. 또, 또. 생각의 끈을 길어지게 한다. 한숨만 푹푹 쉬던 레이겐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말라가고 있는 검은 머리칼을 빤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생일인데 케이크라도 하나 사 줘야... 리츠가 눈을 뜨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불필요한 지출은 사절이었지만 어쩐지 뭐라도 챙겨줘야 될 것 같았다. 무슨 맛이 좋을까. 어린 애니까 초코로 하자. 귀찮은 꼬맹이지만 그 정도는 용서해주겠지. 레이겐은 리츠가 규칙적이고 차분한 숨소리를 낼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든 모습은 저리 아름다운 요정 같은데, 눈만 뜨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 우산도 사야겠군. 하나 쥐여 보내야지. 그래야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된 이유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비를 맞고 있는 이유.


 여전히 투명한 창을 빗방울이 쿵쿵 때리고 있다. 생일. 생일. 생일을 아주 많이 축하한다. 리츠 군. 레이겐은 입 안으로 소리내지 않고 두어 번 할 말을 연습했다. 여름에 태어나 여름을 닮은 소년에게 건넬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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