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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반전





​년의 시선을 느낀 리츠는 긴 다리로 느긋하게 걸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공포에 질린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셔츠 소매를 대충 팔뚝까지 걷어 올린 뒤 가져온 응급 상자를 열어 얼음찜질용 쿨팩을 하나 꺼냈다. 불편한 공기가 내내 방 안에 돌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소년에게 리츠가 물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무엇을 꺼내야 할지 상자 안을 재고 있었다.





"어디가 아파? "

"........"

"어디가 아프냐고. "





소년은 자라다 만 여윈 팔로 제 다리를 감싸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리츠는 별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투로 대꾸하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레이겐이 입고 있던 셔츠 소매가 걷히고 하얀 팔에 잔뜩 든 피멍이 드러났다. 손에 들고 있던 몽글몽글한 팩을 침대에 팍 하고 부딪히자 손끝에서부터 차갑게 냉기가 올라온다. 멍 때문에 올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리츠는 쿨팩을 잔뜩 소년의 팔에 올리고 응급용 테이프로 서툴게 붙여주었다. 처음에는 반항하던 소년도 리츠의 행동을 인지했는지 온순하게 가만히 있었다.

일단 좀 아플 테니까 이거 올려놓고 있어. 발목은 괜찮나? 턱을 괴고 매섭게 레이겐의 다리를 쳐다보던 리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간단한 수준의 투시를 사용해 보니 왼쪽 발목은 접질려서 퉁퉁 불어있었다. 다리에도 온통 멍이 들었다. 이런 아픔을 고작 중학생이나 되는 아이가 견뎠다니. 소년의 하얀 팔을 만지작거리던 리츠는 붕대를 천천히 감아 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시게오가 남긴 흔적들이다. 그가 말한 사랑이 이런 거였나?

병의 본질을 치유하는 초능력을 보유했다면 더 쉽고 간단하게 치유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리츠는 그런 능력이 없다. 가장 기본적인 조치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목을 대고 붕대를 다 감아줄 때까지 소년과 리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치료를 마치고 일어서며 리츠는 다시 접었던 소매 단추를 단정하게 잠갔다. 그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가 네 치료를 해주게 될 거야. 널 때리진 않아. 그건 형이 원하는 게 아니니까. "

".........."

"그리고 말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우린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고 너와 난 남남이다. "

"저기..."





소년의 변성기를 막 지난 낮은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리츠는 차가운 눈길을 그에게 잠시 던졌다. 리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년은 눈치를 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 "





마음속의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리츠는 상자를 잘 갈무리해 공중에 띄운 후 대답 없이 방을 나갔다.


문을 조용히 닫은 리츠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쉼을 반복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가시질 않는다. 설마 형이 이런 놈을 데려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가 남자애한테 성적으로 끌린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던 바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아니지만 나른하게 붉은 기가 도는 눈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것 말고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팔에 난 상처는 마치 장미 꽃잎이 어룽진 것처럼 사랑스럽다. 젠장. 젠장. 젠장.

그렇지만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리츠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년 동안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는 법을 배웠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형이 있다. 토이치로 버금가는 최고의 사이킥 능력 보유자. 그리고 그 소년은 카게야마 시게오가 데려온, 사실상 형의 첩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러니 건드려서는 안 된다. 리츠는 허겁지겁 그 방에서 멀어졌다, -마치 독을 품은 뱀에게서 멀어지려는 듯이.





"리츠가 다녀갔구나. "





가는 우윳빛 목에 감긴 검은색 타이를 풀어내며 시게오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레이겐을 바라보았다. 그가 제게 행했던 폭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덜덜 떨렸지만, 레이겐은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멍을 없애기 위해 붙였던 의료용 쿨팩들이 옆에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그렇게 유추하는 것이 당연할 테다. 태연하게 까만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내곤 시게오는 자연스레 레이겐의 허리에 제 팔을 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머리칼에 짧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젠 안 때릴 거예요? "





레이겐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에 시게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했다. 너, 말할 줄 알아? 다시 아무 말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밀빛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남자는 기분 좋은 듯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원래도 꽤 미남형이지만 웃으니 더 잘생겼다. 남자는 놀리듯 레이겐의 엉덩이에 손을 뻗어 조물거리며 느리게 레이겐의 귀에 제 입술을 부비적거렸다.





"날 사랑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

"......."

"아라타카, 날 사랑하니?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말이었다. 레이겐은 어설프게 그의 단단한 허리에 팔을 감으며 억지로 입을 벌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목구멍 안쪽으로 깊게 삼켰지만.








리츠는 매일매일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게오 또한 매일 일을 했고, 저녁과 아침에 주로 레이겐에게 머물렀기 때문에 리츠를 만날 일은 없었다. 그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소년의 자기치유력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팔과 다리에 가득한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었고 흉터만 어렴풋이 남아있게 되었다. 시게오는 그 상황에 대해 만족해했다. 소년이 리츠로 인해 안정감을 얻게 되면서 시게오에게도 좀 더 붙임성 있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게오는 레이겐이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잘 몰랐지만, 레이겐이 고분고분 잘 따라주면서 거의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표면상으로 사이가 매우 좋았고, 그들이 밤에 뭘 하는지 사실 리츠는 머릿속에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소년의 이름이 레이겐 아라타카라는 것, 곧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거란 사실과 어떻게 그 아픔을 이겨냈는지에 대해. -그 얘기가 나왔을 때, 리츠는 레이겐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을 거란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보답으로 리츠도 적은 양의 정보를 베풀었다. 레이겐이 있는 장소는 손톱 본부이고, 그와 함께하는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사람은 토이치로가 없는 한 이곳에서, 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것. 그 건조한 내용에 레이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리츠의 행동이 호감이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레이겐은 딱 이주일 만에 처음의 그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리츠가 툭툭 차갑게 대꾸하든 대꾸하지 않든 레이겐은 상기된 표정으로 종알종알 제 할 말만 열심히 해댔다. 생기어린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발간 입술을 리츠는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형에 대한 죄책감이 약간 어려 있었다. 리츠는 연고를 다 발라주고 거즈를 단단히 묶어주었다. 팔에 든 멍들이 다 연하게 지워지면서 레이겐의 하얀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리츠가 나갈 채비를 하자 레이겐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

"하나만. "

"이름이 뭐예요? "





별이 박힌 채 반짝반짝 생기있게 빛나는 그 눈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제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린 리츠는 무심한 목소리로 그 말에 대답해 주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리츠.






-





"이제 거의 다 아물었네요. "





리츠는 대답 없이 감았던 붕대를 능숙하게 풀어주었다. 그 날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레이겐과 리츠 사이에는 이제 이상하고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리츠가 올 때면 레이겐은 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졌고, 리츠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어려 있었으며 달콤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붕대를 천천히 풀면서 가끔 닿는 레이겐의 따뜻한 살갗을 그는 천천히 음미했다. 더는 여기 올 필요가 없다. 리츠가 그 방에 올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사라졌다. 고칠 수 있는 곳은 모두 말끔하게 다 재생되었다. 리츠가 붕대를 푸는 동안 레이겐의 손은 리츠의 팔뚝을 느리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어, 리츠 씨.

왜.

그 애는 한참 망설이다 작게 발간 입술을 달싹거렸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리츠 씨 생각을 하면 막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이것도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당신이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





뱃속에 나비 한 줌이 파닥파닥 여린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리츠는 잠시 그 입술을 삼켜버리고 레이겐의 다리를 멋대로 벌려내 제 것을 박아대는 상상을 했다. 밀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발갛게 물든 눈꼬리가 제 쪽을 바라보며 제 이름을 부르는 상상을 했다. 붉게 열에 들뜬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안쪽 깊은 곳을 찌르면 그 입술에선 달디 단 감창소리가 쏟아져 나오겠지.

리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무겁게 뒤따랐다. 리츠, 나와 약속했지? 그 애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레이겐 아라타카는 내 소유야. 리츠. 형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가 서 있는 곳까지 길게 늘어졌다. 성에가 얼기 시작했고, 리츠는 늘 그랬듯 형에게 굴복했다. 나비 날개가 부스러지며 흉하게 진한 인분 자국이 남았다. 리츠는 레이겐의 하얀 손을 모질게 떼어내곤 건조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고칠 수 없어. "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아이에게 더 많은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이제 리츠는 매일매일 다시 지겨운 숫자들에 파묻혀 밀린 예산 집행을 하게 될 것이다.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잔유리 조각들이 흔적처럼 남아 마음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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