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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반전 - 고등학생 레이겐 아라타카
적도보다 한참 위에 있던 그 나라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사계절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봄이면 자그마한 꽃봉오리들에 색이 만족스러울 만큼 스며 들었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열매들이 낙엽과 함께 땅으로 하여금 오랜 결실을 맺게 해 주었다. 겨울엔 흐드러지게 함박눈이 내려 하염없이 서리 낀 창문만 바라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지만 '진짜' 세기의 영능력자 카게야마 시게오는 사계절 따위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작은 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더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다.
오후 네 시부터 다섯 시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면 남자아이가 기세 좋게 들어오며 사무소를 환하게 밝혔다. 여름의 햇살을 녹인 듯한 머리색이 눈에 띈다. 그 애는 만년 여름이었다.
"스승님, 저 왔어요. 밖에 눈이 엄청나게 왔던데요. "
그 남자애 하나로 인해, 그래서 카게야마 시게오도 만년 여름이었다.
만년 여름
소년은 여름을 닮았다. 닮았었다. 지금도 닮고 있다. 주변 사람에게 과한 정을 베풀고, 과한 오지랖을 행사하고, 과한 사랑을 준다. 쨍쨍 내리 꽂히는 직사광선에 말라죽어가도 모른다는 태도로.
중학교 시절부터 곧잘 배짱 좋게 시게오를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은 그 새 키가 부쩍 컸다. 그 나이 때 남자아이들이 하는 비행 대신 레이겐은 조그마한 키에 어울리게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을 찾고 애착을 맺고 싶어 했다. 그 애착의 대가는 시급 3천 엔과 영능력자의 제자라는 타이틀. 그렇다고 해서 교우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가끔은 가라오케 간다는 핑계로 사무소 알바를 쉬기도 했다. 그것도 다 예전 이야기고, 가쿠란을 입던 소년은 멋스럽게 자라 이제는 블레이저를 입는다. 양복이 퍽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는데, 시게오는 그렇게 어렴풋이 생각했다.
레이겐이 형성한 애착이라는 것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늘지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쉽게 피곤해하는 사람에게는 좀 귀찮고 힘들다. 그렇지만 그 애는 상대가 힘들다는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레이겐 아라타카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의 온갖 햇살을 모두에게 베풀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잘못 배송 온 택배와 비슷한 취급을 받곤 했다.
"그래, 어서 와라. "
예, 으... 춥다. 레이겐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시게오는 보던 신문 위로 힐끔 그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계절은 겨울인데 레이겐 혼자 봄인 양 얇게 옷을 입었다. 지퍼를 올리지 않은 청록색 보아털 후드집업은 눈이 내리는 날씨에는 좀 애처로워 보인다. 레이겐은 과장되게 제 양 팔뚝을 붙잡고 문지르다 냉큼 소파에 앉았다. 아직도 추운 듯 깊게 자리 잡은 쌍꺼풀 주름이 계속 찡긋거렸다. 뺨이 다 부르터서 붉게 물든 걸 보니 춥기는 추운 모양이다. 시게오는 턱을 괴고 가만히 바라보다 낮게 물었다.
"따뜻한 거 마실래?"
"네, 뭐. 저야 거절 안 하죠. 근데 스승님, 설마 오늘 내내 밖에 안 나가신 건 아니죠?"
"안 나가면 안 돼?"
"제가 늘 말씀드렸잖아요.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 좋다고. "
레이겐은 잠깐 소파에 벌렁 누워 있다 부스스 일어나 제 스스로 믹스커피를 탔다. 의뢰인이 오면 늘 커피 담당은 레이겐이었고, 이젠 믹스커피 맛으로는 이 지역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그 스스로 자부하는 바였다. 그러면서도 재잘재잘 운동에 대한 찬사는 잊지 않았다. 그 대상은 시게오였지만, 누굴 위한 잔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시게오의 영등등 사무소는 일주일 중 네 번은 고객이 찾아오지 않았다. 실력은 알아줬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첫인상에 많은 걸 판단하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꽤 단정하고 차가운 얼굴이었고 햇빛에 비추어 봐도 변함없이 검은 머리칼이나 빈틈 없이 떨어지는 말투는 그 생각에 획을 더했다. 감정에 서툰 성격이다, 라는 문장은 물론 첫인상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무소에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예? "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신문을 읽는 시게오에게 레이겐은 책상에 그 몫의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어, 고마워. 시게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다시 내렸다. 그 입꼬리는 레이겐이 오기 삼십 분 전부터 자꾸 올라갈랑 말랑했다.
사실은 요즘 좀 이상하다.
레이겐 아라타카를 보면 기분이 좋고, 그의 생각을 많이 하고, 그의 생각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시게오는 그게 다 여름을 닮은 남자 고등학생의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답지 않게 흰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 아니, 아니면 영등등 사무소의 히터 바람이 너무 세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스승님, 제 말 듣고 계세요? "
"어? "
"에이, 이것 봐. 또 안 듣고 계셨네. "
상념을 깨고 갑자기 들이밀어진 하얀 얼굴에 시게오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놀란 걸 티내지 않으려는 듯 금방 잔잔해졌다. 이렇게 불쑥 그어진 선을 치고 넘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레이겐은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았던 게 퍽 서운한 눈치였다. 기분이 다 드러나는 부루퉁한 표정에 시게오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겐. 타코야키 먹을래? "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요? 타코야키 한 접시에 넘어가게?"
"싫으면..."
"두 접시. "
레이겐은 냉큼 손가락 두 개를 펴 들었다. 하여튼, 성장한 건 키뿐인 것 같다. 시게오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다 신문을 천천히 반듯하게 접었다.
*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라. "
저도 알아요, 앗 뜨거! 주의를 준 게 바로 몇 초 전인데 레이겐은 그새 입을 벌려 하나를 쑤셔넣고 고통스러워했다. 재미있는 듯 시게오는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며 초능력으로 타코야키 하나를 식혀주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진 거리는 생각보다도 훨씬 춥고 바람이 거셌다. 아침부터 왔다던 눈은 다 녹았는지 이젠 흔적만 엷게 남아있다. 시게오는 역시 그동안 너무 히터 온도를 너무 높여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승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사실 제가 했던 얘기도 그냥 운동 좀 하시라는 잔소리였고. "
"그럴 것 같더라. "
넌 원래 다른 것에 신경을 잘 쓰잖니. 길가에 버려져 있는 동물은 결국 집에 들이고, 이지메 하고 있는 양아치들에게 괜히 오지랖 부렸다가 쥐어 터지고선 시게오를 말리겠답시고 한다는 소리가,
'별로 안 아파요, 괜찮아요. 걔네 지능도 딸려. '
쓸 데 없이 햇살을 퍼 주지, 귀찮게. 그는 야금야금 문어빵을 후후 불어먹는 레이겐의 옆모습을 자꾸만 훔쳐보고 있었다.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는 가다랭이포를 능숙하게 슥슥 모으던 레이겐이 빤히 시게오를 바라보다 기분 좋은 듯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방긋 웃어보였다.
"스승님, 늘 감사합니다. "
"어?"
"앞으로도 계속 제 옆에 있어주세요. 음, 고등학생이 하니까 좀 징그럽나. 그렇지만 스승님이 좋아요. "
순간 확 귀 뒤까지 열이 올라온다. 시게오는 아무 연모의 감정 없이 순수하게 사제의 정을 말하며 생긋거리는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제 감정과 맞닥뜨릴 자신도, 자각조차 없었다. 몸이 덥다.
그는 진심으로 거리가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소 히터 바람 때문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추운데도 마음이 햇볕으로 녹아들어 가는 걸 보면.
아아, 만년 여름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말라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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