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브레이리츠] 결핍 上
연령반전
감금
손톱 AU
유혈
갑작스레 그늘진 표정의 남자가 문을 벌컥 발로 차고 들어왔다. 그 손에는 늘 벌건 꽃잎이 방울방울 얼룩져 있었고, 가끔 신부의 드레스 끝자락처럼 땅에 질질 뭉개지며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고생한 티 없이 예쁜 손은 늘 비어 있었지만, 오늘은 뜻밖에도 손님이 있었다. 젠틀하게도 소년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고 눈도, 입도, 귀도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천으로 막았다. 보드라운 밀 빛의 머리칼은 한쪽이 검붉게 물들어 피가 고여 있었다. 남자는 어쩐지 조금 상기된 표정이다.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열었을 때부터 카게야마 리츠는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맞닥뜨린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바로 손에서 쥐고 있던 서류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남자를 막아섰다. 마침 사무실로 내려가던 참이라서 어쩌면 다행이었다. 리츠는 시게오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방해만 된다는 듯 강한 배리어에 밀려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형이 손님을 데려온 일은 처음이다.
"형?"
"…………."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결핍
손톱은 세계를 정복하는 대신 더 음침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갉아먹었다. 그들은 사회 전반에 관여했고, 초능력자들은 음지 양지를 가리지 않았다. 자릿세를 떼는 소소한 일도 그들의 업무에 포함되었지만, 강한 초능력자들이 암묵적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우대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손톱의 그림자가 되기를 원했다. 모두가 손톱의 힘에 굴복했다. 민중의 지팡이는 더러워졌고, 도덕심은 바닥에 버려졌다.
손톱을 창립한 스즈키 토이치로가 매스컴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었지만, 강력한 초능력자를 처리하는 일은 5초 중 한 명인 카게야마 시게오가 맡곤 했다. -어른이 되면서 선명해진 그의 외모와 다르게, 그 눈은 여전히 건조하고 생기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사람과 만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일이 없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주로 그의 동생인 리츠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의 강력한 힘 때문에 조직 내에서 토이치로 버금가는 권력자였지만 시게오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을 끌기에는 모두 무언가 부족했다.
태생적으로 브레이크 장치가 고장 나 있던 시게오를 겨우겨우 제 궤도로 달리게 해준 사람은 그의 동생인 카게야마 리츠였다. 시게오가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때마다 리츠는 악착같이 그의 형을 구해냈다. 형은 그의 하나뿐인 혈육이었고, 사랑보다 더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끔 형이 어딘가 하나가 삐뚤어졌다고 느끼곤 했다. 옆집 고양이가 끔찍한 모양새로 죽었을 때, 일진 하나가 어금니가 몽땅 빠져 학교를 못 나왔을 때 리츠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형. 나도 거기 들어갈래. '
'…….'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 '
그는 형이 손톱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같이 지원했다. 시게오가 청부살인의 중추라면 리츠는 재정 부서의 핵심이다. 능력은 시게오보다 좀 떨어졌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수천 배 영리했고 똑똑했다. 시게오의 동생이라는 사실 덕분에 바로 손톱 공금 관리를 맡았다. 회사원으로 사기업에 입사했어도 충분히 성공했겠지만, 그는 손톱에서 이십 대 후반답지 않게 높은 연봉을 받았다.
시게오는 리츠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무실로 그 소년을 끌고 리츠를 지나쳤다. 리츠는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얼른 서류를 모아서 먼지를 털어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게 무슨 일이지. 종잇조각들을 주우면서도 계속 상념이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시게오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부로 인간을 데려온 적이 없다. 다른 초능력자들과의 만남조차 극도로 꺼리는 형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의 일에 무관심했지만, 오늘 본 소년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전투에 투입된 적이 없는 리츠에게 소년의 머리에 있던 상처는 크게 잔상으로 남았다. 게다가 혹시나 방금 속박당한 채 있던 아이가 능력이 없다면 더 골치 아파졌다. 토이치로의 눈에 띄었다간 바로 죽을 텐데. 리츠는 제발 시게오가 기계로 그 애의 초능력을 뺏기 위해 데려왔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내가 왜 처음 본 애 걱정을 하고 있지. 리츠는 머리를 몇 번 흔들곤 떨어진 핏자국을 초능력으로 사라지게 했다.
*
눈을 가렸던 천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벗겨지는 게 느껴져서 소년은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 천장의 평범한 방이었다. 아직도 아까 얻어맞은 왼쪽 머리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다. 입 안은 터졌는지 잔뜩 쇠 맛이 났다. 몸 여기저기가 다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아프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보인 것은 까만 머리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정신이 좀 들어? 레이겐 아라타카. "
듣기 좋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들었다.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레이겐은 미간을 찡그리며 궁리했다. 어쩐지 기억이 돌아오는 속도가 좀 느리긴 하지만 상관없다. 하교 후 친구들과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만난 저 남자. 자신을 보더니 반쯤 미친 얼굴로 내 친구들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레이겐을 기절시켰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한 레이겐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 왜 여기로 데려온 거죠? "
"네가 예뻐서. "
담담하게 입술을 움직이는 남자 때문에 레이겐은 불쑥 짜증이 샘솟았다. 손을 뻗어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오한이 돌았다. 사춘기를 막 지난 남자애답게 예쁘다는 말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뾰족하게 가시를 머금었다. 레이겐은 차갑게 경멸을 뱉었다.
"더러워, 시발. 존나 더럽고 역겹네. 변태 호모… 악!"
몸이 솟구쳤다가 아무 예고 없이 강하게 바닥에 처박혔다. 겨우겨우 피딱지가 앉은 머리에 다시 뭔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레이겐의 몸을 베개 집듯 사뿐히 붙잡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뒤 주먹을 쥔 반대쪽 손으로 복부를 하염없이 후려쳤다. 말버릇을 다시 교육시켜야겠구나… 폭력을 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손과 다르게 목소리는 사근했다. 커헉, 헉. 아,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악! 레이겐은 눈물이 줄줄 나서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변성기가 갓 지난 그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소리쳤지만, 그 비명은 남자의 손짓 한 번에 완전히 차단되었다. 왜 기절을 안 한 거지? 영화에선 이 정도 맞고 나면 기절할 텐데? 머리는 계속해서 멍청한 생각만을 반복했다. 레이겐에게서 손을 뗀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소중한 보물 다루듯 천천히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예쁘네. "
"으…."
"난 카게야마 시게오란다. 그리고 나한테는 복종해야 해, 앞으로. 알겠지?"
죽고 싶지 않으면…. 상냥하게 늘어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레이겐의 기억은 끊겼다.
*
그 이후 일주일 동안 레이겐의 삶은 아주 초라하고 조용했다. 그는 한 번 얻어터진 이후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용한 탓이었다. 매일매일 침대 위에서 무기력하게 숨을 쉬었고, 식사는 늘 자신을 때린 카게야마라는 남자가 제시간에 와서 떠먹여 주었다. 어쩐지 즐거운 표정을 하고 숟가락을 든 남자의 단단한 손을 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겁에 질린 레이겐을 보는 걸 남자는 즐거워했다. 그는 매일 매일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자신의 방에 있는 꽃병에 다른 꽃을 꽂았다.
방은 무척 컸지만 단조로웠다. 책은 많이 꽂혀 있지 않았고, 책상과 침대, 노트북, 빛바랜 가족사진 등등이 있었지만 레이겐은 가족사진에 낀 먼지를 후 불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젠 그곳이 어딘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는 일도 없었다. 시게오는 밤이면 다시 찾아와 레이겐을 안고 잤다. 거절이나 반항하는 기색이 있으면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매일 밤 레이겐에게 속삭였다. 널 본 순간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게 빛났는지, 원하는 걸 모두 다 이뤄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사랑한다는 정체 모를 떨림 어린 말들. 제 허리를 감싸는 단단하고 온기 어린 팔.
레이겐은 딱 죽고 싶었다. 머리의 상처는 아주 천천히 아물었다. 다 여물지 못한 몸이 아파서 잠이 들면 끙끙 소리가 났다.
"리츠, 오랜만이야. "
"형?"
사무실에 들어온 뜻밖의 손님에 리츠는 씨름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던 리츠는 얼른 손님용 의자를 손짓해서 제 옆으로 가져다 놓았다. 얼른 앉아, 형. 오랜만이네? 리츠의 말에 시게오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리츠가 시게오를 만난 건 그 이후로 한 번도 없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앞으로는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해하는 시게오의 목소리를 음성 메시지로 들은 것이 고작이다. 리츠야 그 이후부터는 같은 부서 여직원들과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눴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사실은 궁금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게오가 일부러 찾아와 주었으니 굳이 오지랖을 부려볼 필요도 없다.
시게오는 그사이 놀라울 만큼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늘 생기 없고 창백했던 뺨은 달콤한 긴장으로 복숭앗빛이 돌았고, 입가에는 잔잔하게 미소가 맺혀 있었다. 누구나 뒤를 한 번 돌아볼 만큼 사랑에 빠진 미남이었다. 리츠가 짚이는 것은 딱 하나였다. 그 남자애가 형을 변하게 했어.
"잘 지내지. 요즘은 행복해. "
"나도 형이 기분 좋아 보여서 좋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네. "
따라 잘생긴 웃음을 지으며 리츠는 목을 죄는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맸다. 시게오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뜸을 들이다 진지한 눈빛을 하고 리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어렸을 때는 리츠가 좀 더 컸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시게오가 앉은키나 선키 모두 리츠를 넘어섰다. 숨결이 닿도록 시게오는 얼굴을 가까이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리츠는 묵묵히 시게오를 바라보았다. 사무실 전체에서 시게오의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도청을 차단하기 위해 배리어를 쳤을 것이다.
"그게, 실은. 리츠, 부탁이 있는데. "
"음, 형이 말하는 거라면 다 들어줘야지. 어떤 건데? "
내가 요즘 방에서 키우는 예쁜 애가 있는데. 한참을 눈에 띄게 머뭇거리다 시게오는 결국 말을 꺼냈다.
"그… 그때 네가 봤던 아이 있잖아. 그 애한테 상처가 생겼는데, 금방 안 낫길래. 좀 도와줬으면 해서. "
"나는 치유계 에스퍼가 아닌데 괜찮을까? "
"괜찮아. 물리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줘도 돼. "
"알았어. "
"리츠, 나는 이제 삶의 이유를 찾았어. "
갑작스레 건네진 말에 리츠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시게오는 목적지 없는 삶치곤 꽤 대견하게 잘 달려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게오는 자연스레 턱을 괴고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은 아무런 티 한 점 없이 고르게 빛났다. 그 애를 본 순간 깨달았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난 아라타카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나 봐. 남자인 건 중요하지 않아. 늘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되잖아, 죽을 때까지. 리츠도 그렇게 생각하지? 재잘재잘 이어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자랑에 리츠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여진 고개와 내민 대답은 형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내포한다.
"어, 응. 당연하지, 형."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그의 삶의 기본이었다.
*
다음 날 아침이 좀 지난 시간에 리츠는 의료전담반 사무실로 내려갔다. 뭘 찾으시냐는 여직원들의 호기심과 관심 어린 물음에 대충 둘러대곤 커다란 구급상자 하나를 빌려왔다. 빌린 상자를 들고 리츠는 시게오의 방이 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츠가 문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자 방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리츠가 방문할 것을 대비해 시게오가 배리어의 강도를 낮춰놓은 게 틀림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뀐 것 없는 구조와 가구의 배치가 리츠를 반겼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금발을 한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겁먹은 짐승처럼 소년은 날쌔게 벽에 등을 붙이고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리츠를 바라보았다. 리츠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소년은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듯 이리저리 침대 위에서 몸을 움직였다. 소년과 청년 사이, 위태히 줄타기를 하는 듯 남자아이의 모습은 흰 피부 때문에 조금 유약해 보였지만 깊게 쌍꺼풀 진 눈은 강단과 함께 은은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발간 입술은 청초했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쳤군, 카게야마 리츠.
완전히 돌았어.